Frank Auerbach
물감을 두텁게 바르는 임파스토 기법, 여인 초상화, 런던의 캠던타운의 풍경화, 뛰어난 관찰력
물감을 두껍게 바르는 그의 임파스토 기법은 호평과 악평을 동시에 받았다. 어떤 비평가들은 그의 그림이 조각 같아 보인다고 혹평했다. 아우어바흐의 독특한 작업 공간과 작업 습관은 몇 년에 걸쳐 거의 신화화되었다. 1954년부터 그는 런던의 작업실에서 일 년 365일 가운데 364일을 작업을 했다고 전한다. 이처럼 그림을 그리는 데 몰두했던 아우어바흐에게 빅토리언의 작업실은 안식처이기도 했다. 또 그는 제한된 수의 모델만을 그렸고, 작업실 주변의 도시 풍경들을 그렸다. 열정적으로 작업에 매진했지만 일 년에 열둘에서 열다섯 정도밖에는 완성하지 못했다. 물감을 여러 겹 바르는 것이 그의 작품의 트레이드마크인데, 가끔은 손가락을 이용해 칠하기도 했다. 심사숙고해 그리고 지우고 하는 작업 과정 자체가 그에게는 아드레날린 역할을 했다. 강박적으로 특정 주제의 그림을 그렸던 그는 1990년에 그 주제가 아니라면 그림은 아무런 의미도 없다고 하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것은 단순히 제스처에 불과하다. 하고자 하는 동기가 있는 것만이 그림의 주제가 될 수 있다."




Alberto Giacometti




파리에서의 최초의 4년간은 그랑드 쇼미에르 미술연구소의 E.A.부르델 교수 밑에서 조각과 데생을 시험하여 보았으나 눈에 보이는 것을 조형하는 어려움에 절망하여, 1925년경부터는 사생(寫生)을 중지하고 상상력에 의한 관념적 공간조형을 시작하였다. 그렇게 해서 얻게 된 것이 추상적·환상적·상징적·전율적인 일련의 오브제(objet)였으며, 이것들은 초현실주의자들에 의해서 높이 평가되어 1929∼1934년 초현실주의 그룹의 한 중요 구성원으로서 권위적인 작품을 발표하였다. 1935년 이후는 사생(寫生)에 의한 조각에 몰두하여, 고독과 침묵 속에서의 오랜 탐구 끝에 1948년에 공허 속에서 응결된 것과 같은 가느다란 조상(彫像), 즉 그 자신은 철사와 같이 가느다랗게 깎이면서 그 주위에 강렬한 동적 공간을 내포한 날카로운 조상을 발표하였다. 이 작품들이 주목을 끌어, 이후 조각계의 제1인자로서 널리 인정받게 되었다. 동시에 입체적인 공간을 유화로 추구하는 일을 계속하였으며, 또한 예리한 묘선(描線)에 의한 데생과 판화에 있어서 우수한 작품을 남겼다. 이들의 제작은 모두가 눈에 보이는 현실―공허 속에 나타나는 허상(虛像)―그대로를 보이려는 시도였으며, 서유럽 조형미술의 전통에서 가장 현대적·전위적인 표현이었다.
Lucien Freud
루시안 프러드 (Lucien Freud)는 오스트리아에서 태어난 유태인으로 어린 시절 나치즘의 세력이 커지며 부모와 함께 영국으로 이주한다. ‘39년 영국의 시민권을 획득한 그는 이후 계속 영국에서 교육을 받는다. 대학 졸업 후 ‘41년 프러드는 Atlantic 호위대의 상선 선원으로 군복무 하였으나, 의병제대를 하고 이후 ‘43년 니콜라스 무어(Nicholas Moore)의 시집 일러스트를 맡게 된다.
스타일 변화
프러드의 초기 작품들은 초현실주의에 가까웠고 주로 사람, 식물, 동물을 작품의 대상으로 했다. 그리고 칠의 두께를 얇게 그린 것이 그의 그림의 특징이었다. 하지만 ‘50년대부터 초상화를 그리기 시작하는데 종종 누드를 그리기 시작했다. 또한 칠의 두께가 점점 두꺼워진 것도 이때부터다.
프러드의 초상화는 보통 앉아있는 사람을 대상으로 했는데 가끔 마루에 누워있는 자세나 다른 사물과 병치상태로 있는 것 또한 그림의 주제로 삼았다. 특히 동물을 사람 옆에 병치했는데 그러한 작품 중에는 <Girl With a White Dog(1951-1952)>, <Naked Man With Rat(1977-78)> 등이 있다. 프러드는 말했다. “난 사람의 있는 그대로를 표현하기 위해 사람을 그리는 것이 아니다. 또한 추악한 사람을 아름답게 표현하기 위해 그리는 것도 아니다. 다만 사람은 어떻게 그리는 지에 따라 달라지기 때문에 사람을 그리는 것 뿐이다.”




Gerhard Richter




사진에 기초한 흐릿한 이미지, 추상화, 풍경화(바다 풍경, 도시 풍경, 눈 내린 풍경), 초상화, 정물화, 향수어린 주제
리히터는 1960년대에 사진을 모으기 시작했다. 사진은 그 자신의 것도 있었고, 신문이나 잡지, 책에서 스크랩한 것도 있었다. 그는 '사진 회화'의 제작을 위해, 프로젝터로 캔버스 위에 사진을 비춰 대상의 형태를 그렸다. 또 원본을 기준으로 삼아 색채를 선택했다. 안료를 얇게 발라서 대상의 이미지는 핀트가 안 맞는 것처럼 흐릿하게 표현되었다. <엘리자베트 Ⅰ>(1966)처럼 그 결과 덧없는 순간에 대한 향수를 기록한 듯 보이는 작품이 탄생했다. 이 작품들은 낭만적인 그림(고급 미술)과 가족의 스냅사진(저급 미술) 사이에 위치한 듯하다.
리히터의 사진 목록집 『아틀라스』는 그의 사진 회화를 위한 광범위한 모티프 모음이 되었다. 리히터의 이데올로기에 대한 거부는 사회주의 국가, 그리고 그 다음에는 동독의 공산주의 치하에서 젊은 시절을 보냈던 데서 그 이유를 찾을 수 있다. 그는 1961년에 서독으로 넘어왔다. 1963년에 리히터는 소비문화에 대한 항의의 표시로 미술가 지그마르 폴케와 콘라트 피셔와 함께 '자본주의 사실주의 운동'을 벌였다. 같은 해 뒤셀도르프에서 그의 첫 개인전이 열렸다.
우연의 도상학은 그의 작품의 특징이다. 1960년대 중반부터 리히터는 추상 작품을 제작하기 시작했다. 그의 초기 작품들은 '기존의'(found) 색표에 의존한 것이다. 그 후 그는 <회색>(1974)이 포함된 회색의 단색조 회화 연작을 제작했고, 다시 사진같이 마감한 채색 추상 작품을 그렸다. 대표적인 작품으로 <추상화 439번>(1978)이 있다. 리히터의 후기 작품들은 추상화에서 <바다풍경>(1988) 같은 풍경화로 방향을 수정했다. 그는 관람자가 회화 대 사진, 기록 대 재현의 관계에 대해 생각하도록 촉구했다.
Jenny Saville
1970년 Cambridge에서 태어난 Jenny Saville은
1992년, Glawgow School of Art에서 학위 취득 후,
미국의 University Cincinnati 메서 6달동만 장학금을 받고
공부하게 되는데, 그 곳에는 그녀는 많은 뚱뚱한 여자들을 보게 된다. 피카소의 작품에서 사람의 신체를 단순한 그림이 아닌 작품에 담겨져 있는 물체로써 보고 감명을 받았던 Saville 은, 그 당시 그가 흥미가 있어 하던 특징적인 여성의 신체를 Cincinnati 에서 많이 보고 추후 그녀의 작품에 영향을 많이 미치게 된다.
작품을 위해 성형 수술 장면도 많이 보고, 본인의 일그러진 누드 사진도 찍는 등 아름답고 성적인 요소의 여성의 몸이 아닌 다른 시각으로 여성의 누드를 다루었다
1993년, Slades school Fine 에서 공부중 영국의 유명 수집가 Charles Saatchi가 그녀의 Senior show를 전부“ 구입하면서 그녀에게 전폭적인 지지를 해주었고,그 때부터 Savillee은 짧은 시간에 명성을 높일 수 있었다.
그 거대한 스케일이 주는 웅장함 뿐만이 아닌 대담하고 강렬한 붓터치, 자신을 주로 모델로 한 오묘하고 괴상하게 표현된 작품 속 피사체가 관람객을 압도한다.
루시앙 프로이드의 후계자로 고전주의적인 초상화를 새로운 방향으로 제시하고 있어요. 영국의 회화 스타일에서 찾아볼 수 없는 스타일이에요. 여성을 다룬 누드화 역사상 유례 없는 비만 여성을 다룬다는 점에서 살 덩어리를 묘사한 작품이 독특해요.




chuckclose




매우 사실적임, 주로 친구들의 모습을 여권 사진처럼 정면에서 본 모습으로 그린 거대한 극사실주의적인 초상화, 캔버스에 사진을 재생하는 복잡한 격자 체계를 사용함
척 클로즈는 그의 세대의 미술가들 가운데서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이다. 그는 워싱턴 대학과 예일 대학에서 공부한 후 유럽으로 건너갔다. 그 후 다시 미국으로 돌아와 매사추세츠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그는 작품 활동 초기에 추상표현주의 양식으로 그림을 그렸으나 후에는 극사실주의적인 작품을 제작했다. 초기에는 흑백으로만 그림을 그리다가 1970년대에 들어 유색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1973년에 그의 작품이 뉴욕 근대 미술관에서 전시되었다. 독특한 방식으로 전통적인 기법을 사용했던 척 클로즈에게 창작 과정은 완성된 작품과 마찬가지로 중요했다. 그는 사진을 이용해 주로 친구들의 초상을 거대한 캔버스 위에 그렸다. 이 초상화들에는 배경의 묘사가 거의 없으며, 주인공은 관람자를 똑바로 쳐다보는 모습이다. 얼굴에 초점이 맞춰진 이 작품들은 마치 거대한 여권 사진 같다. 클로즈는 종종 동일한 사진들을 가지고 반복해서 그림을 그렸다. 매번 다른 기법들을 적용하긴 했지만, 그의 작품들은 모두 비슷한 과정을 거쳐 완성되었다.
그는 우선 사진을 격자로 나눈 다음, 각각의 격자를 캔버스에 조심스럽게 옮겨 그렸다. 그는 이런 식으로 회화와 판화를 작업했다. 에어브러시, 페인트 붓, 파스텔 등을 사용한 회화 작품은 완성에 수개월이 걸렸고, 판화 작품(보통 스크린 판화, 리노 판화, 목판화)은 수년이 걸리기도 했다. 그의 작품들을 멀리서 보면 그리드들은 통합된 이미지처럼 보인다. 그러나 가까이에서 보면 스크린의 픽셀처럼 보인다. 그의 후기 작품에서는 그리드가 직사각형 형태가 아닌 불규칙한 형태로 바뀌었다. 그러나 사진 같아 보이던 특징은 여전히 그대로이다. 1988년에 그는 척추혈관이 손상되어 하반신이 마비되었으나, 조수의 도움을 받고 손에 붓을 묶어서 작품 활동을 계속하고 있다.
Egon_Schiele
예술양식 : 표현주의 화가, 초상화, 자화상, 풍경화, 고통에 사로잡힌 인물들, 십대 소녀들의 노골적인 데생, 밀실공포증적인 도시 풍경화
구스타프 클림트의 친구이자 피후견인이었던 에곤 실레는 클림트의 표현주의적인 선들을 더욱 발전시켜 공포와 불안에 떠는 인간의 육체를 묘사하고, 자신의 성적인 욕망을 주제로 다룸으로써, 20세기 초 빈에서 커다란 논란을 일으켰다. 빈 공간을 배경으로 툭툭 튀어나온 뼈가 도드라져 보일 정도로 앙상하게 마르고 고통스러운 모습을 한 실레의 자화상은 고뇌하는 미술가 신화의 전형을 보여주는 듯하다. 이것은 그의 작품의 어느 일면일 뿐이다. 실레의 도시 풍경화들은 역동적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인파로 넘쳐나는 도시 모습의 이면에는 어떤 긴장감이 감춰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묘한 매력을 지니고 있다. 실레가 그린 장인의 초상에서 알 수 있듯이, 그가 그린 초상화들은 감정이입의 표현이 훌륭하며, 가장 뛰어난 초상화 작품들에 속한다.실레의 왜곡된 인물 습작은 접사다리 위에서 작업한 것에 기인한다.
그는 여인들과 소녀들의 누드화를 적나라할 정도로 솔직하고 생생하게 묘사한 드로잉을 제작하기 시작했다. 이 드로잉들은 실레가 크루마우로 이주한 후인 1911년에 문제가 되기도 했다. 그는 모델이자 동거녀었던 발레리 '발리' 노이칠과의 자유분방한 생활과 미성년자들을 모델로 그린 그림들 때문에 크루마우에서 추방당하게 되었다. 노이렝바흐에서는 더욱 이해받지 못했다. 1912년 실레는 그곳에서 어린 모델들을 데려다가 부도덕적인 그림을 그렸다는 죄목으로 잠시 동안 유치장 신세를 져야 했다. 1915년 실레는 발리와의 동거 생활을 청산하고 에디트 하름스와 결혼했다. 1918년이 되자 실레는 지난 몇 년간에 비해 훨씬 더 안정된 삶을 살게 되었다. 아내인 에디트는 임신한 상태였다. 실레는 빈 분리파에서 엄청난 성공을 거두었으며, 그해에 사망한 클림트의 자리를 이어받았다. 이 시기에 그는 곧 태어날 아기를 기다리며 아버지가 된다는 기대감으로 <가족>(1918)을 완성했다. 새롭게 발견한 희망을 보여주는 듯한 이 작품에서 실레와 아내, 아이는 모두 나체로 묘사되어 있으며 특히 인물들의 행복한 표정이 눈에 띈다. 하지만 같은 해 10월, 실레의 아내는 당시 유럽을 휩쓸던 스페인 독감에 걸려 사망했고, 아내와 뱃속의 아기를 잃고 슬퍼하던 실레도 스페인 독감으로 3일 뒤에 세상을 떠났다.




MARLENE DUMAS




신문이나 잡지, 포르노그래피 등에서 수집한 이미지 속 초상을 회화로 옯겨내며, 인종차별, 여성, 종교 등 사회적 문제에 반응하는 작가 마를렌 뒤마는 1953년 남아프리카공화국 케이프타운에서 태어나 1972년부터 3년간 케니프타운 대학에서 공부했으며, 이후 백인 중심의 인종차별과 예술 작품 검열에 진저리를 친 그는 조국을 떠나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에 정착했다.
이미지의 본질을 옮겨내는 '뒤마'식 심리초상화
오늘날 미국과 유럽 미술계에서 가장 '핫'한 작가 마들렌 뒤마(1953~)는 미술사 속에서 진부한 소재인 '초상'을 채택, 30여 년 동안 지극히 회화적인 방법으로 그려왔다. 이런 점에서 그의 회화는 전통의 한 등고선 위에 위치한다고 볼 수 있는데, 다만 그가 그린 초상들은 고전적인 그림에서처럼 우람하거나 아름답지 않다. 오히려 단순.긴밀한 구도와 흐릿하고 역동적인 붓질, 신체의 뒤틀림 등 에곤 쉴레와 프란시스 베이컨의 그것처럼 무겁고 진지하며 히르테릭하고 잔혹하기까지 하다.
뒤마는 모델을 캔버스 앞에 세우는 대신 그날그날 신문이나 잡지, 폴라로이드 사진 등에서 받은 인물들의 순간적 인상을 화면에 거친 붓질로 풀어헤치고 이겨 바른다. 이때 대상은 대체로 이미 죽었거나 곧 죽을 운명을 맞이할 사람들로, 신문의 사회정치면에 기록된 사건사고 속의 인물들(체포된 자, 눈을 감을 포로, 테러리스트, 물에 빠지거나 교수형에 처해진 이민자), 모녀, 포르노 잡지 속 에로틱한 이미지, 종교, 인종차별, 악몽, 잔혹동화 등 지하세계의 기록보관소로부터 끌어올려진 타자의 이미지들이다. 작가는 그들을 구상과 추상, 삶과 죽음, 내부와 외부세계의 중심에 놓고 보편적인 인간의 고통과 비극, 즉 말살된 인간성과 정체성에 대해 집요하게 질문한다. 질문을 받은 대상들은 재생산과 변형을 거쳐 '뒤마'화 되며 본래의 모습에서 형체만을 간신히 유지한 채 음울하고 흐릿한 보습들로 표현되곤 한다. 특히 그 주변을 차지하고 있던 풍경은 말끔하게 소거되어 추상성을 극대화하고 존재와 장소의 상황을 폐지시킨다.
실제로 작가는 마주하기 싫은 불편한 진실이 폭로를 통해 우리의 감각 깊은 곳에 자리한 어떤 충동을 이끌어낸다.